〈show ad 〈2〉 @Gwanghwamun Plaza〉
박보마, 〈show ad 〈2〉 @ Gwanghwamun Plaza〉, 이미지 슬라이드(50 장), 2013. ©박보마
Q 상영작인 〈앙뚜아네뜨의 귀걸이〉 시리즈는 2010년 작이지만 이미 박보마 작가, 혹은 ‘fldjf studio’가 표방하는 무드를 이미 지니고 있는 것 같다. ‘진짜’가 아니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혹은 아름다워지려는 것들, 럭셔리 하지 않지만 반짝이고 몸에서 빛날 수 있는 액세서리와 같은 요소에 대한 관심은 초기 작업부터 드러난다. ‘앙뚜아네뜨의 귀걸이’는 어떻게 만나게 되셨는지, 왜 그것이 흥미로웠는지, 그리고 이러한 작업을 구상하기까지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 궁금하다 .
B ‘앙뚜아네트의 귀걸이’는 재학 중이던 학교 후문에 있는 문방구를 구경하다가 발견했다. 그 상품의 이름을 먼저 보았는지 귀걸이의 플라스틱 펜던트를 먼저 보았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당시를 떠올리면 네 가지 색상의 귀걸이들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내가 매혹된 아름다움이 그것 자체의 아름다움인지 아니면 그것이 표방하는 다른, 혹은 진짜 보석을 상상해 느낀 것인지는 구분하기 어렵다. 귀걸이들의 이름이 ‘앙뚜아네트의 귀걸이’였는데 그 이름으로 인해 나는 그 물건이 긴 시간이 주는 가치와 서구의 이미지를 쉽게 연출하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과 감정에 미쳤고, 충동적으로 귀걸이를 데려다가 나의 방 빛이 제일 잘 드는 벽에 진열하고 싶었다.
Q 박보마 작가의 작업의 여러 계열 중 하나인 〈show ad〉는 “댄서 qhak”의 활동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계열의 작업에서는 보통 작가가 직접 등장하여 반짝이가 달린 드레스를 입고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곳을 거닐거나 하면서 스스로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여성의 신체가 된다. 이렇게 스스로가 건물의 로비로, 광화문 광장으로, 어떤 행사로 퍼포머로서 등장해야 한다고 느꼈던 이유는 무엇인가? 요즘에는 댄서 혹은 퍼포머로서 나오는 작업을 보기가 드문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B 건물의 로비, 광화문 광장 등지에서 진행된 퍼포먼스, 이벤트의 주변부(‘행사의 퍼포머’)로서의 등장 형식은 작업의 여러 차원이 그보다 더 큰 부피로 존재하는 것에 속하는 형태여야 완성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형식적인 면에서도 개념적인 면에서도 그렇다. 당시 〈show ad#12297;와 드레스 작업은, 어떤 면에서는 내가 생각하는 그리고 이후에 어어간 작업의 방식과 형상-흩어져 있고 분열적인-을 이미지로 반영한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후 이어간 작업에서는 작업 프레젠테이션 방식, 작품 개체가 존재하는 방식, 물질이나 사물이 전시장에 등장하는 방식에서 내가 원했던 언어들로 치환하여 채워갔다고 생각한다. 이후의 과정에서 〈show ad〉의 욕구와 욕망을 해소해 나간 것 같다.
Q 상영회에서 함께 본 작업을 포함하여 작업 전반에서 어떤 초대, 낭만, ‘여성스러움’, 로맨스를 암시하는 요소들을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대상으로서의 남성이 등장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마사지와 같은 ‘서비스’를 약속하지만 실제로는 그 누구를 위해서도 봉사하지 않는 제스쳐를 보이기도 했다. 작업을 통해 풀어가고자 하는 여성스러움 혹은 여성으로서 맺게 되는 관계에 대한 생각이 있는지 궁금하다. 작업에서 자주 등장한 ‘서비스’의 요소에 대해서도 더 들어보고 싶다.
P 작업 진행 과정에서 언어가 정리되는 동안 ‘여성스러움으로 관계 맺기’ 또는 ‘여성으로서 맺게 되는 관계’를 의식해왔지만, 여성스러움과 나열하신 몇 가지 코드들이 작업의 개념으로서 등장한 것은 아니었다. 작업은 관찰하고 매혹되는 사물, 감정, 심상을 재현하고 싶은 동기가 가장 컸고, 그것들을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 더하여 어떻게 해야 그것들로 그것대로 그것들처럼 있을 수 있을 것인지를 고민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몽상’, ‘느낌’, ‘무드’, ‘감성’이라고 불리는 것들의 언어와 그 언어들의 방식으로 존재하기인데, 그 언어들은 대부분 역사에서 이야기되지 않은 영역이었거나 자본에 쉽게 소비되는 성질의 무엇이라고 본다. 그것들을 어떻게 재현할 것인지, ‘미술 언어’로 어떻게 등장시킬 것인지 고민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언어에 어떤 전위와 전복이 있다고 생각했다.
다음으로 그 당시에 집중했던 개념이나 키워드로 이야기를 하면 좋을 것 같은데, 당시에 항상 상기했던 질문은 ‘어떻게(해야) 사라지는가’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사라짐은 ‘수치심’이라는 감정을 불러일으켰는데, 그에 따라오는 여러 감정들과 맥락들이 작업에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합니다.
‘서비서’는 서비스라 통용되는 이미지, 형식, 사회적 맥락 그리고 작업 내부의 개념 (이를테면, 보이게 되는 서비스 제공자, 서비스 행위, 돈으로 살 수 있는, 여성으로서의 정체성, 가짜-극, 수동성의-)을 통해 선택했다고 생각한다. 작업에서의 서비스라는 극은 으레 있는 서비스와 다르게 이미지로서만 다루기 위했던 것 같아, 실제 ‘서비스’처럼 (논리에 맞게) 이루어지는 일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서비스’가 직업으로서 실제 세계에서 어떤 거래로 (더) 이루어지길 바랐고 여전히 고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