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 Piece

⟪던전⟫ 설치 전경. 〈Stand Piece〉, 종이에 아크릴과 연필, 2015.

한 진


⟪Orgazmic Scrap⟫으로 반지하, 커먼센터, 공간사일삼에서 전시를 했다. ⟪던전 Dungeons⟫(2015), ⟪오늘의 살롱 Today’s Salon⟫(2015)에 참여했다. 현재 서울에서 작업중이다.

Q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자료를 찾아보니 ⟪던전⟫(2015)1이나 ⟪오르가즈믹 스크랩⟫ 시리즈 (2014-2017)2에 대한 서술에는 어김없이 애니메이션, 그중에서도 ‘미소녀’가 등장한다. 하지만 막상 작가 본인의 맥락에 대한 이야기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H    ⟪던전⟫에서의 작업은 대전 게임의 캐릭터를 모델로 삼았다. 대전 액션 게임 〈데드 오어 얼라이브(DOA)〉 캐릭터 중에 ‘카스미’와 다른 캐릭터들이 머릿속에서 뒤섞여 나온 것 같다. 그것들을 참고하되, 미완성의 상황을 연출하고 싶었다. ⟪던전⟫의 경우 프로젝트 자체가 RPG 게임의 구조를 따랐는데 사실 그전까지 RPG 게임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때 처음으로 해보게 됐다. 같이 게임을 해보고, 서로 좋아했던 애니메이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전시 준비를 계속했다. 그 때문에 던전을 하면서 일을 한다는 느낌보다는 동인활동을 한다고 여겼던 것 같다. 그전까지는 작업에서 만화의 형식을 어떻게 다루면 좋을까에 대한 고민이 풀리지 않은 상태였는데, ⟪던전⟫이 그런 부분을 어느 정도 해소해켜주기도 했다.


‘미소녀’에 대해서는, 작업에서 의도적으로 ‘미소녀’를 등장시키려고 한 건 아니다. 그동안 그렸던 그림이 일본 만화의 스타일에 익숙한터라 그렇게 보이게 된 것 같다. 그보다는 캐릭터의 원형에 초점을 두고 싶었다. 학교 다닐때는 한참 캡콤(CAPCOM)사의 일러스트레이션을 좋아했는데, 일러스트레이터 중에 니시무라 키누(西村 キヌ), 신키로(蜃気楼)의 일러스트를 좋아했다. 그림체를 흉내내보기도 하고. 〈레인(Serial Experiments Lain)〉이라는 애니메이션에도 빠져있었다. 하나만 꼽자면 가이낙스의 〈프리크리〉를 가장 좋아했다. 더 어릴 땐 ⟨버추어 파이터⟩라는 게임을 굉장히 열심히 했던 기억이 난다. 게임에 등장하는 캐릭터의 움직임이나 근육 표현을 보고 멋지다고 생각했는데, 초월적이고 날렵한 몸에 대한 환상을 가진 것 같다. 완전히 허상인 신체에 대한 것.



도판 1

⟪던전⟫ 설치 전경. 〈Stand Piece〉, 종이에 아크릴과 연필, 2015.


Q    게임이나 만화의 형태나 서사 등 여러 요소들 중에 어떤 것을 보고, 어떤 지점에서 자극을 받는지 궁금하다.

H    확실히 어렸을 때는 애니메이션에서 성우의 역할이 제일 크게 느껴졌다. 중학교 때 만화 동아리 활동을 한 적이 있었는데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각각 맡아서 성우 역할을 했다. 대본을 프린트해서 카세트 테이프로 녹음하고 그랬다. 언니들이 성우들을 알려주고, 어떤 성우가 다른 작품에 참여한 걸 알게 되면 그 작품들 찾아서 보고. 그때는 성우를 좋아하는 문화가 있었던 것 같다. 다들 되게 좋아하니까 나도 좋아해야겠다, 이런 마음도 작용했던 것 같고. 성우가 좋아보였다. 그런데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에서 주인공을 맡은 성우가 엔딩곡을 부르는 걸 볼 때 이상한 감정이 생기는 거다. 어디에 캐릭터와 실제 사람 중 어느 쪽에 감정 이입이 되는건지 헷갈릴 때가 많았는데, 노래는 외우게 됐다.

Q    그렇다면 만화를 전공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것도 같은데?

H    만화과에 진학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당시에 만화 전공을 하려면 ‘상황 표현’이라는 입시미술을 해야했다. 그런데 도저히 엄두가 안 났다. 너무 하기 싫어서 포기했다. 예고에 다니고 있었고, 다섯 가지 전공 수업 과정을 마친 후 결국은 한국화에서 붓을 다루는 방법이 만화 드로잉 같고 재밌어서 한국화를 선택하게 됐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미술 작가가 되어야겠다는 마음은 없었다. 전공 수업도 재미없었고. 그냥 한국화에서 사용하는 기법을 나중에 내 그림에 써먹어야지, 이런 생각을 했던 거 같다. 그러다가 4학년 때 서양화 전공 수업을 수강하면서 미술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

Q    만화에 관심이 있었지만 막상 한국화를 전공했던 점이 재미있다. 지금의 그림에서 그런 궤적을 찾아보게 되기도 하고. 결국 만화과에 가지 않은 것은 어쩌면 작화에 대한 욕심이 없었던 걸까? 애니메이션을 보면서도 그림을 그리는 것 자체가 아니라 다른 것에 관심이 있었던 걸까?

H    그랬던 것 같다. 만화가나 애니메이터가 되고 싶은 것보다 하나의 이미지에 집중했다고 할까. 애니메이션 화보나 게임 설정집 같은 걸 많이 봤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작품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요소에 관심을 둔 것 같다.

Q    그럼 작업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2014년부터 2017년의 작업이 하나의 연결되는 맥락 속에 있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찾아보니 모두 제목이 같았다. 물론 캐릭터의 요소를 연상시키는 색감이나 표현이 있지만 그걸 인물 만들기, 혹은 신체에 대한 관심으로도 보이기도 했다.

도판 2

⟪오르가즈믹 스크랩⟫(반지하, 2014) 설치 전경



H    반지하의 프로젝트부터 생각해 볼 수 있겠다. 2013년부터 주거 겸 작업실 공간을 혼자 쓰게 됐다. 새벽에 작업해도 되는 공간이었고, 처음에 엄청 신났다. 혼자있다는 것 자체로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그게 작업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그때 드로잉을 오브제처럼 만들어보면 어떨까, 종이로 된 부피감 있는, 뭐가 될지 모르겠지만 만들어 보자, 그리고 캐릭터적인 인간을 그려넣자, 이런 흐름으로 움직였다.

Q    반지하 공간 자체도 혼자 사는 방을 연상하는 구석이 있다. 그곳에 구조물들을 엉거주춤하게 세워두었다. 반지하에서 했던 전시가 〈오르가즈믹 스크랩〉의 첫번째 시리즈이고, 이때부터의 작업이 내가 알고 있는 한진의 작업이다. 그런데 그 전에 했던 작업은 못 본 것 같다.

H    2011년 겨울에 전시를 했다. 도형적인 캐릭터를 그린 페인팅과 드로잉 설치였다. 가지고 있던 만화의 이미지를 캔버스에 옮기기까지 고민이 있었다.

Q    캐릭터를 작품의 영역으로 가져오는 데에 대한 고민은 어떤 것이었나?

H    점점 회화로 관심이 기울다 보니 만화의 그림체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구가 컸다. 그 시기에 인체를 다룬 과거 작가들의 작품을 찾아봤는데, 프란시스 베이컨, 피카소, 파울 클레의 그림들이었다. 그들이 드로잉에 접근하는 방법이 궁금했다.

Q    잘 몰라서 함부로 말하긴 어렵지만 일본 애니메이션 특유의 정형화된 인체 표현이 있는 것 같기는 하다. 개인적으로 여성의 신체를 표현하는 특정한 방식에 대해서는 여전히 납득하거나 이입하기 어려운 지점이 있기도 했는데 한진 작가는 애니메이션에서 영향을 받은 것 같은 표현이 드러나지만, 동시에 생소한 비율의 신체를 드러내는 것 같아서 어떤 고민을 했는지 궁금하다.

H    우선은 형태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일본 만화체의 전형을 따르기보다 이를 해체하거나 좀더 회화적일 수는 없을지를 고민했다.

Q    캔버스에 그리지만 입체감을 주기보다 표면을 건조하고 얇게 쓰기 때문에 억지스러운 연필 필치가 남겨진 것도 아닌데 회화가 드로잉 같이 보이는 특징이 있다. 신체가 파편화되기보다는 연장되고 연동되고 역동적으로 느껴진다든지 하는 점을 주목해서 보게 된다.

H    드로잉이 그런것 같다. 가까운 도구가 사용되고 그 감각이 캔버스로 이동한다.

Q    ⟪오르가즈믹 스크랩⟫ 시리즈를 전형적인 형태에서부터 나와서 인체를 어떻게 그릴 수 있을지를 고민한 과정으로 읽어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한진 작가의 작품이 유난히 신생공간의 맥락에 밀착되어 독해되는 경향이 강한 것 같다. 그런데 ⟪취미관⟫를 통해 구매한 작품을 집에 두고 보니까 인물의 연장된 신체가 주는 힘 같은 걸 오히려 많이 느꼈다. 일종의 미미한 수호신, 예쁜 부적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H    제 작업에 그런 기능이 실제로 있다면 정말 좋을 것 같다.



도판 3

⟪오르가즈믹 스크랩⟫(커먼센터, 2015) 전시 설치 전경

Q    지난 몇 년간 지속된 제목의 의미는?

H    날 것에 대한 감상인것 같다. 가상의 감각들, 성 정체성, 남성적인 것, 여성성의 근원같은 것을 자주 생각했다. 신체가 분산되는 감각을 떠올린다거나 다른 물질의 외피에 붙거나 그것에 의해 보호되거나 어떤 자연적인 경험으로 흡수되는 상태를 상상했다. 그러면서도 안전한 세계같은 것.


2013년에 카페에서 전시를 하게 됐는데, 그 때의 전시제목이 ⟪shallow things from rubbish - drawing and scrap⟫이었고 그 연장선 일 수도 있겠다.


도판 4

⟪shallow things from rubbish - drawing and scrap⟫ 전시 포스터, 2013


도판 5

〈드로잉 & 스크랩〉, 2013

Q    이때 이미 드로잉을 포장했었네? 왜?

H    최소한의 보호막이었다. 지퍼백 보관 상태 그대로 벽에 붙여서 보여줄 수 있었다. 그리고 비닐 자체가 좋았다. 투명하고 얇은 질감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Q    여기에도 그렇고 반지하에서도 그렇고 드로잉은 드로잉인데 어떻게든 만져서 세워놓은 것들이 있다. 간신히 선, 무게중심이 어쩌다 맞아서 섰다거나 벽에 기대어 높이를 얻게 된 것들. 드로잉으로 신체를 표현하기도 하지만 드로잉 자체가 몸체로서 등장하기도 한다.

H    반지하에서는 드로잉이긴 한데, 드로잉을 가지고 덩어리를 만들면 어떻게 될까 궁금했다. 부피가 있거나, 오브제 같은 드로잉. 조각은 아니지만. 형태를 만질 수 있는 드로잉. 하지만 이 작업을 하는 과정이 캔버스에 밑그림을 그려내고 색을 칠하는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리면서도 부피있는 것, 오브제 같은 것을 만들고 싶었다.



도판 6

도판 7

⟪OS-⟫(공간사일삼, 2017) 설치 전경



Q    반지하와 커먼센터에서의 작업이 확실히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보였다면 공간사일삼에서에서는 좀 더 확고한 분위기가 있었다. 신체 표현도 좀더 확장되고 단단하다고 느꼈다. 인간은 아니지만 그 비슷한 신체를 가진 인물들이 좀 더 강력해 보였달까. 뭔가 달라졌던 걸까?

H    커먼센터 이후에 계획했던 작업에서는 작품 자체에 대한 완성도를 높이고 싶었다. 반지하, 커먼센터로 이어진 프로젝트를 공간사일삼에서 마무리하고 싶었다.

Q    캔버스를 세워둔 곳에서는 인물이 서있는 것 같았다. 그 전보다 그 신체가 더 견고하고 강하게 다가왔다. 앞서 이야기했던 신체 비율에 대한 고민에 더 집중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인격체로 생각되는 얼굴이 보이다가도 인간이 아닌 것 같은 신체 비율을 보면서 어떤 중간 존재 같은 걸 생각했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H    애니메이션이나 만화에서 보이는 안전한 세계관-유토피아-이 내 작업 안에서도 보여지기를 바랬다.

Q    그러한 고민이 반지하의 전시에서도 엿보이지만 ⟪OS-⟫에서는 캔버스 작업이 주가 되다보니 인체의 문제를 화면 안에서 해결해보려고 한 것처럼 보였다.

H    ⟪굿-즈⟫에서 드로잉을 투명 아크릴박스에 넣은 작업을 판매했다. 여기저기에 그려두었던 드로잉을 오리거나 구겨 담았다. 캔버스 안에 그려내는 것이 같은 맥락인 것 같다. 반지하에서 보여주었던 작업에서 부피감이 주된 요소이었다면 캔버스에서는 깊이를 고려하게 되는 것 같다. 그 안에서 작동하는 세계를 파고들게 된다. 그게 무엇인지는 그려봐야 알게 된다. 계획을 세우지만 막상 시작하면 생각했던 것과 다를 때가 많다. 방법을 더 연구해야겠다. 내가 느끼는 감각을 그대로 옮겨내고 싶은 욕구가 있는데 대상과 너무 밀접하게 느껴질 때가 있어서 거리 조절도 필요할 것 같다. 그럴 땐 음악을 듣는 게 좋은 것 같다.

Q    구현되는 형태랑 색이 잘 붙어있는 것 같다. 선택하는 색이 채도가 많이 올라갈 때도 있고 캔버스에 올라갈 거라 기대하지 못하는 색도 있는데 억지스럽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H    컬러 팔레트의 조합에 대해 고민한다. 특히 패션 사진을 많이 보게 된다.

Q    앞으로 어떤 작업을 하고 싶은가? 이후 작업 계획이 있다면?

H    회화작업을 더 할 것 같다.



*
2018년 8월 6일 @ 한진 작가 작업실


  1. 1   ⟪던전(DUNGEONS)⟫은 서울 시내 4개의 공간을 섭외하여 각 공간을 하나의 연결된 던전으로 설정한 프로젝트로, 총 4개의 공간에서 3번의 전시와 1번의 출간기념회로 구성되었다. 강정석, 김동희, 김정태, 이수경, 한진이 공동으로 기획했다. 

  2. 2   세 번의 개인전으로 구성되었으며, 각각 반지하 B½(2014), 커먼센터(2015), 공간사일삼(2017)에서 진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