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성의 스튜디오⟩
EUSUNG 불현듯 붓과 물감을 정리해서 한 켠에 넣어 둔 이후 정신차려보니 제법 많은 툴들을 가지고 있다. 수공구(칼, 끌, 줄, 망치), 만파, 스크롤쏘, 엔진톱을 주로 쓰고 그 외에 여러 공구들을 가지고 있다. 작업실이 4층이고 크지 않아 큰 기계를 들이는 것은 불가능해서, 필요한 경우 내가 다니는 공방에서 나무를 재단하고 평을 맞추고 집성해서 가져오는 과정이 생긴다. 언제 완벽한 환경을 갖추겠나 싶어서 그냥 삐걱대고 우당탕거리며 작업을 시작한다.
일시정지 상태의 동작
JIWON 움직이지 않는 조각과 끊임없이 움직이는 조각가 사이의 간극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조각:조각가= 정적: 동적”이라는 구도가 결코 절대적이지 않으며, 이러한 이분법에는 함정이 있다는 점도 인지한다. 다만 조각이 홀로 설 수 있어야 한다는 명제와 조각가는 부지런히 몸을 놀려야 한다는 명제 사이에 고여 있는 감각이 무엇인지 미분해볼 기회가 드물었을 뿐이다. 작가가 자신이 부재한 상태의 작업실을 촬영하자는 제안을 했을 때, 어쩌면 그 사이를 들추어볼 수 있겠다고 기대했다.
조각에 동세를 부과하는 여러 방법들을 볼 수 있다. Un and heli처럼 나무와 스테인리스의 대조적인 텍스쳐, 푹 패인 자국 사이로 번져 있는 석고 자취의 효과로 그것이 마치 동력 있는 기계처럼 느껴지거나. 감속 컨테이너처럼 목재에 산업용 바퀴가 삽입되어 즉물적으로 이동의 잠재력을 심어넣는다거나. Dandelion Acceleration처럼 당장이라도 걸을 것 같은 상태의 다리를 형상화하거나. 물론 여기서 ‘다리’는 오금이 잘려나갔고, 위에 크록스 조각을 올려두어 상반신의 연결 가능성을 차단한다는 점에서 유기적인 신체로의 연상을 방해한다는 점이 돋보인다. 이렇게 각기 다른 접근들이 보이는데, 공통적으로 운동/동작을 인간적인, 즉 마음으로부터 동하여 신체가 이동하게 되는 것으로 보는 대신 기계적인 위치 에너지(potential energy)의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 같다. 그래서 운동성/이동의 ‘자세’와 ‘태도’만 지닐 뿐, 실질적인 액션으로는 연결되지 않는데. 이러한 충돌과 자제력이 형태들을 더 매력적으로 만든다.
EUSUNG 2019년에는 평면을 다루던 관성이 남아 벽에 걸리는 조각을 만들었었고, 작년부터는 본격적으로 홀로 서 있는 오브제들을 만들고자 했다. 벽에서 떨어져 나와 바닥에 면을 대고 서거나 눕거나 앉아있는 사물들을 만들고 싶어졌다. 조각을 해왔던 사람들에게는 너무 클래식하고 당연한 조건이겠지만, 내겐 그 부분이 여전히 매력적인 조건으로 다가온다. 그 어떤 형상을 만들든지 인간이나 동물 혹은 곤충 등 일종의 몸으로 직유될 수 있는 가장 단순한 조건으로 느껴져 더 그러하다. 덧붙이자면 스스로 시간성에 묶여 쓰고 있던 도상들, 이를테면 주제나 명칭이나 카테고리를 가진 이미지들이 현재로선 그다지 필요하지 않아졌다. 동력 자체가, 찰나의 감각이, 보이지 않는 힘들이 드러나는 방식에 집중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재료’는 내게 평면에서의 ‘도상’을 대체하며 열린 새 스토리지 같은 것이다.
피부를 깎고, 뚫고, 다듬기
JIWON 언젠가 피어싱을 시도해보고 싶다고 했을 때, 귀 사진을 찍어서 보내주면 배치를 같이 고민해보겠다고 제안해주셨다. 피어싱이나 타투 등 신체에 직접 밀착시키거나 부착하는 장식을 하기 시작하면, 맨 피부가 비어있는 바탕, 빈 캔버스처럼 인식되기 시작한다. 비로소 피부의 벌거벗은 상태를 인지하게 되는 것이다. 인체의 형상을 재현해온 조각의 유구한 역사를 생각해보면, 그것들은 많은 경우 (옷을 입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장식이나 부착물이 없다는 의미에서) 벌거벗었다. 목재를 귀 모양으로 깎고, 피어싱을 박아 넣은 피어스(Pierce)[1][2]는 조형의 표면을 벗은 피부로 전환한다. 하지만 깎아낸 흔적들을 굳이 매끈하게 마무리하지 않았기(흉터가 남아 있는 상태) 때문에 오는 질감의 충돌이 나타난다.
귀, 코, 그리고 다리를 분절해서 장식하는 접근도 보이는데, Dandelion Acceleration은 걷는 다리에 옷을 입히고, 위에 목재 크록스를 얹어두었다. 다리가 입은 껍질/포장/옷의 뒷면이 트여 있어서, 그것이 내재적인 모습이라기보다 부과된 스킨이라는 점이 두드러진다.
EUSUNG 붉고, 노르스름하고, 검고, 허여멀건 하게 복잡한 색 변화를 이미 자체에 품고 있다는 점에서 확실히 나무라는 재료가 무의식적으로 표면에 대한 인식을 피부, 신체라는 것으로 연결해준다. 텍스쳐에 있어서는 작업을 할 때 ‘굳이 매끄럽지 말자’ 정도의 생각으로 열어두며, 형태에 더 집중한다.
끌어안는 프레임과 나누는 패턴
JIWON 목재 프레임은 두터울 때 특히 목가적이고 노스탈직한 느낌을 준다. 저가항공과 맛집(detail. #1 of 4 pieces)처럼 조각난 이미지를 가두면서 (항공기의) 형상을 부여하는 작업부터, Hello, my old contemporary friends(discussion room), Frame Anatomy처럼 나무 몸체의 일부에 드로잉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거나 Testing에서는 무빙이미지를 프레이밍하기도 한다. empty filled frames, Winter singing, 추상시간 -소나기, 뼈-, vita-more와 같이 특정한 이미지가 삽입되지 않는 프레임도 다수 보이는데, 이러한 경우에는 프레임만 부각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언제라도 별도의 이미지가 붙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둔 것이었을까? 멀고 먼 소금그릇에서 다룬 틀/프레임과 내용물의 구분이 역전되는 지점의 연장선상에 있는 걸까?
물론, 목재가 아니더라도 패턴을 배치하여 무언가의 외곽을 두르는 회화 Techno girls プリクラ(Lizbeth special), 은색 윤곽처럼, 무언가를 ‘두르는’, ‘가두는’ 프레임이 자주 등장한다.
EUSUNG 모델링을 해봐야 하는 경우라면, 특정한 하나의 재료를 툴로 사용하기보단 손에 잡히는 무르고 쉬운 재료들로 형태를 그려본다. 어차피 내가 주로 사용하는 재료들로 실물을 만들 때는 계획을 다시 세워 보아야 하기 때문에, 모델링 단계에서는 재료를 자유롭게 써보려고 한다. 그럴 때 해당 재료의 특성 때문에 우연히 발견되는 형태나 느낌, 조립법이 있고, 여기에서 머릿속에 있던 계획의 틀 바깥으로 나를 이끌어가는 지점들이 생긴다. 그럴 땐 기꺼이 따라간다.
EUSUNG 내 작업에 적절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는, 끝나지 않는 정리정돈에 대한 마음가짐과 흡입력이 좋은 집진장치가 필요하다. 늘 먼지와 나무 재가 수북하게 쌓였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니까. 한창 나무를 주로 사용하는 작업이 진행되는 시기에는 하루에 3~4번씩 작업실 전체를 컴프레셔로 털어내고, 청소기를 돌리고 물걸레질을 한다. 매끈하거나 깔끔하지 않은, messy한 상태가 종료되지 않는 공간 안에서, 0으로 돌아왔다고 느끼는 쾌감이 피어나고 금새 사라진다. 하지만 청소는 대체로 무의식에 있는 좋은 감정들을 위로 올려주기 때문에, 이 과정들이 싫지 않다. 그리고 튼튼한 작업대 겸 테이블이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