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pe of Shame-Pilot Episode. The Third Eye〉

이빈소연, 〈Shape of Shame-Pilot Episode. The Third Eye〉, 32p, 148*210mm, 자가출판, 2019

이빈소연

https://leebinsoyeon.com/


Q   그래픽 스튜디오 ‘이해와 오해’를 운영하며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을 하셨던 걸로 알고 있는데, 어떤 계기로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하게 되셨나?

L   함께 스튜디오를 하던 선배가 디자인, 나는 일러스트로 나누어 일했는데 사업이라기보다는 소꿉놀이에 가까웠다. 선배와 즐겁게 놀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다가 서로의 커리어가 발전이 없다는 걸 갑자기! 뒤늦게! 깨닫고 노는 건 이쯤 하고 서로 하려는 것에 집중하자며 스튜디오를 접었다. 일러스트는 단순히 그리길 좋아하다 의뢰를 받으면서 직업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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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자키 준이치로(쏜살 문고 다니자키 준이치로 선집), 『여뀌먹는 벌레』, 민음사, 2018. (표지 일러스트레이션: 이빈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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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자키 준이치로(쏜살 문고 다니자키 준이치로 선집), 『무주공 비화』, 민음사, 2020. (표지 일러스트레이션: 이빈소연)

Q   책 표지 작업을 하는 과정이 궁금하다. 특히 민음사의 〈쏜살 문고: 다니자키 준이치로 선집〉의 표지 작업 후기에서 ‘강한 개성을 지닌 각 인물의 헤어스타일이나 옷차림, 뒷모습을 표현해서 독자들의 상상력을 제한하지 않으려 했다’는 점이나 선집 표지 삽화 작업인 만큼 시기별로 나뉘어 색감을 쓴 점이 인상적이었다.

L   가장 먼저 출판사에서 보내준 원고를 읽으며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인물이나 표현을 노트에 적어가며 전체 내용을 파악한다. 그다음에는 그릴 것을 구상하는 것과 리서치를 하는 것을 동시에 한다. ‘뭘 그릴까’의 단계는 화면 구성부터 그 안을 채우는 요소까지 계속 생각을 해가며 그릴 것들을 골라내는 과정이다. 리서치 단계에서는 작가 이력, 작품 해석 논문, 관련 책 등 주로 읽을거리 위주로 찾아보고, 정확한 오브제가 필요한 경우에는 이미지도 모은다. 글 속의 인물을 그리는 건 늘 고민된다. 그려진 얼굴은 때로 영화 속 배우나, 사진 속 인물보다 강렬하게 다가올 때가 있어서 영상보다 상상의 여지가 많은 책에 제 개인이 떠올리는 인물을 캐스팅하는 것처럼 여겨져 점점 꺼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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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랑, 오리 이름 정하기, 위즈덤하우스, 2019 (표지 일러스트레이션: 이빈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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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피스오브 Vol. 1 - 선우정아, 디자인이음, 2019 (내지 일러스트레이션: 이빈소연)

Q   일러스트레이션 작업 중 기억에 남는 작업이 있다면 무엇인가?

L   표지 그림은 책을 만드는 한 부분이라 작가, 편집자, 디자이너분들과 함께 하는 일인데, 운이 좋아 지금까지 좋은 전문가분들과 일했다. 덕분에 경력이 짧은 것에 비해 많은 걸 배울 수 있었다. 성숙한 전문가와 일하는 것의 가장 큰 장점은 외부적인 요인에 마음 쓸 일이 없다는 거다. 일에만 집중할 수 있고 작업과정이 괴롭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일들이 기억에 남는다.

Q   일러스트레이터로서 책의 표지나 삽화 작업을 하면서, 동시에 직접 쓴 스토리를 바탕으로 그래픽 노블 작업도 하신다. 두 작업 모두 특유의 미감이 드러나지만, 작업하는 입장에서는 고려사항이 다를 것 같다. 두 작업에서 중점적으로 고려하는 요소는 무엇인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기도 하는지?

L   책 표지의 경우는, 작가의 글을 독해하여 책이 매력적으로 보이는 그림을 그리는 게 제 역할이고 의뢰 작업은 출판사로부터 가치를 인정받은, 출판될 작품이라는 안정감이 있다. 책 안에 글이 있으니 무언가를 그릴 명분이 충분히 주어진 상태다. 반면 개인 작업을 하다 보면 의구심이 들 때가 있다. ‘지금 생각하는 것을 그려야 할 이유가 있나’, ‘치기 어린 생각인가’, ‘맞는 그림인가’ 하는 고민 든다. 따라서 의뢰 작업은 원고와 매력에 가장 중점을 둔다. 표지가 그 책의 첫인상을 결정하기 때문에 매력적으로 보이는 데에 집중하되 그림보다 글을 우선시하여 작업한다. 만화나 개인 작업의 경우, 내가 만든 이야기와 글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리기 때문에 확정된 우선순위 없이 타당성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이다. 표지 작업의 주체는 원고와 글을 쓴 작가이고, 개인 작업의 주체는 저인 셈이죠. 그걸 분리했기 때문인지 주제는 서로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스타일 측면에서는 통일성을 주려 노력한다.

Q   “일종의 규칙을 통해 흥미로운 이미지를 생산해내는 실험 플랫폼”인 에루어(ELUR)를 동료들(웹 디자이너 손아용, 그래픽 디자이너 정연지)과 함께 운영하고 계신다. 동시대 일러스트레이션 작업의 ‘소재’에 대해 생각을 나눈 프로젝트로 알고 있는데, 2019년에는 100명의 일러스트레이터와 함께 “귀엽고 사랑스러운” 소재인 강아지와 고양이를 다루는 프로젝트 〈CAT vs DOG〉를 진행하셨다. 동시대 일러스트레이션의 현재 동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지? 앞으로 ELUR는 어떤 활동을 계획하고 있나?

L   지난 에루어를 만들던 시기에 국내 일러스트 대형 페어에 가면 개와 고양이 그림이 압도적으로 많고 구매율도 높았다. 이러한 트렌드로 인해 많은 일러스트레이터가 수요가 큰 그림을 그릴 것인지, 내가 좋아하는 그림을 그릴지를 고민하게 된다. 그런데 그건 일러스트레이션의 어떤 측면을 강조할 것이냐에 따라 결정되는 문제라 작가마다 출발점이 다양하다. 에루어는 판단의 자세를 취하지 않고 동향이 던지는 고민에 작가가 어떤 결정으로 답하는지를 이미지로 파악해보는, 일종의 사회학 실험이다. 에루어는 정연지 디자이너를 주축으로 한 팀이기 때문에 그가 에루어 활동 재개를 알리면 계획이 생길 것 같아요. 또, 동향을 파악하는 건 일러스트레이터로서가 아니라 에루어 팀원으로서의 업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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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빈소연, 『장례식의 도둑』, 쪽프레스,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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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빈소연, 〈Time of Everything 모든 것의 시간〉, 112p, 185*256mm, SSE PROJECT,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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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빈소연, 〈Shape of Shame-Pilot Episode. The Third Eye〉, 32p, 148*210mm, 자가출판, 2019

Q   출간하신 그래픽 노블/만화 작업 소개 부탁드린다.

L   쪽프레스에서 출간된 〈장례식〉 3부작과 중편 그래픽노블 〈Time of Everything 모든 것의 시간〉, 그리고 현재는 유튜버의 삶을 시트콤 형식으로 그린 〈Shape of Shame〉 시리즈를 자가 출판하고 있다.

Q   직접 이야기를 쓰고, 만화 작업을 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 구체적으로 생각해두었던 독자층이 있는지?

L   쪽프레스의 제안으로 시작했다. 그전까지 한국 순정만화랑 〈요츠바랑〉, 딱 두 장르만 읽어봤다. 얼결에 하게 된 거라 시작할 때 독자층이나 메시지는 생각할 겨를 없었다. 당시에 외할아버지 장례식에서 엄마가 겪는 일을 보고 누군가 죽은 자리에서 산 자들의 여러 이면이 드러난다고 생각하며 엄마를 위로해주려 그린 〈장례식의 도둑〉이 첫 만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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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빈소연, 〈Time of Everything 모든 것의 시간〉, 112p, 185*256mm, SSE PROJECT, 2018

Q   2018년에 발간한 〈Time of Everything〉을 구상하게 된 계기로 ‘중학생이었을 때 같은 반에 악성 곱슬머리인 애’와 ‘마동석이 되고 싶다’는 마음을 꼽았다. 직접 쓰는 이야기에는 여성으로서의 본인의 경험을 녹여내되 단편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 사이의 관계로 엮어내는 특징이 있는데, 어떤 요소에서 주로 아이디어를 얻는지, 그리고 스토리는 주로 어떻게 엮어내는지 궁금하다.

L   마음이 꽂힌 주제나 사건에서 아이디어를 얻을 때도 있고, 불현듯 재밌는 생각이 떠오를 때도 있고, 마감 때문에 쥐어짜서 나오는 경우도 있고, 매번 다르다. 스토리는 프로젝트 진행 기간 중에 계속 생각하는 것 같다. 소재가 좀 튀는 경우는 그걸 어떻게 활용할지를 중심으로 기승전결의 전체적 뼈대를 정한 후 이야기에 살을 붙여 나간다. 사건 전개가 중심일 때는 콘티를 그리며 다음 상황을 순서대로 만들어나간다. 또 친구들이 한 인상적이고 웃긴 말이나 상황들을 메모해두는데, 그걸 쭉 훑어보며 이걸 왜 적었지 싶은 것을 지금 구상하는 이야기와 엮어 상상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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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빈소연, 〈Shape of Shame-Pilot Episode. The Third Eye〉, 32p, 148*210mm, 자가출판, 2019

Q   〈Shape of Shame〉(2019~)에 대해 소개 부탁드린다. 브래지어를 입지 않는 유튜버 지망생 ‘나’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가 다른 작업보다 더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많은 여성들이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라고 생각했는데, 구상하게 된 계기와 전달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무엇이었나?

L    제가 어렸을 때부터 얼굴이 자주 붉어진다. 별것도 아닌 일과 심지어 내 상황이 아닐 때도 붉어지는 게 너무 지긋지긋한 했다. 저와 같은 친구가 있는데, ‘우린 홍익 인간이 맞나봐’ 하면서 고충을 나누기도 했다. 재작년 즈음부터 주위에서 유튜브를 하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하고 싶었지만 도대체 내가 할 수 있을까 싶었다. 사람도 없는데 카메라 앞에다 말한다는 게 생각만 해도 얼굴이 뜨거워진다. 그런 고민을 만화로 만들면 어떨까 싶어 시작했다. 이걸 시작하면 나중에 유튜브를 할 만한, 스스로 납득이 되는 맥락이 생기니까.

또 유튜브를 보면 그 안에서 참 희한한 일들이 벌어진다. 어떤 채널은 거의 공영방송 수준의 심의 기준을 지키는데, 어떤 채널은 유튜브가 선사한 자유도를 만끽하고. 댓글도 마찬가지다. 이 채널 댓글 창은 아비규환에 난리가 났는데 저 채널은 평화롭고 점잖다. 유튜브에선 ‘이게 이렇게 될 일이야?’ 싶게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사람들이 반응하고 사건이 전개되는 걸 실시간으로 볼 수 있다. 내가 밖으로 나가도 이 세상 모든 사람들과 사회를 체험해보지 못한다. 그런데 유튜브를 보면 세상엔 나와는 다른 생각과 기준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내 입장에서 흥미로운 소재가 마구 쏟아지고 있기 때문에 꼭 그리고 싶었다. 저는 〈Shape of Shame〉을 통해 독자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기보다는 인상적인 시대의 한순간을 캡처한 걸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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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빈소연, 〈Shape of Shame-Episode 2. Spark Joy〉, 32p, 148*210mm, 자가출판, 2020

Q   〈Shape of Shame〉의 첫 번째 에피소드가 출판되었고, 이어서 두 번째 에피소드도 발간했다. 이 프로젝트를 에피소드로 진행하시는 이유가 있나? 앞으로 더 보여주고 싶으신 것이 있다면, 무엇인지?

L    제가 시트콤을 좋아하는 이유와 비슷하다. 드라마는 하나의 주된 상황 설정을 가지고 여러 편으로 엮고, 시트콤은 환경이나 인물은 동일하지만 상황이 매번 바뀐다. 그 상황이 에피소드마다 중요한 소재이자 주제고, 등장인물마다 사건에 반응하는 걸 보는 게 재미 요소다. 더 유쾌하면서 블랙코미디 요소도 강하고, 드라마보다 빠르고 가볍게 시의성을 적용시킬 수 있다. 이런 점이 만화를 만들며 즐거워하는 부분과 통하는 것 같다. 그래서 장편 만화보다 단편 만화를 더 즐겁게 작업한다.

앞으로 보여주고 싶은 건 너무 많다. 유튜브에서 워낙 별의별 일들이 많이 생기니까. 얼마 전에 흥미롭다고 생각했던 건 부유함에 대한 호감과 선망을 넘어 그게 하나의 미덕과 신뢰의 기준이 된 유튜브 댓글이다. 어떤 유튜버의 하울 영상1에 댓글 중 ‘이 사람이야말로 모태 부자다. 다른 유튜버들은 이 사람만큼 부자도 아니면서 플렉스를 한다. 게다가 이 모태 부자 유튜버는 이런 게 일상이라 오히려 털털하고 겸손하고 사투리를 써도 우아해 보인다’라는 것이 있었다. 왜 타인의 부에 계급과 자격을 나누는지, 모태 부자만이 부의 진정성을 거머쥘 수 있는 거라 다른 부자들을 아니꼬워 하는 거면 일론 머스크의 ‘자수성가’ 영상에 달린 수많은 리스펙 댓글은 무얼 의미하는지, 부유한 여성을 인정하는 데 왜 다른 부유한 여성을 깎아내리는 게 필요한지, 애초에 이 모든 여성의 부에 왜 자신의 인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지, 사투리를 써도 우아해 보인다는 게 대체 무슨 의미인지, 모태 부자는 겸손할 것이라는 전제는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 묘한 심리가 이리저리 섞인 댓글을 이번 편에서 꼭 보여주고 싶었다.

또 만화 속 인물들을 훨씬 입체적으로 보여주고 싶다. 한 2회 정도 인물이 우울에 빠져있다든지, 어딘가 망가져서 답지 않은 선택을 한다든지, 짜증을 유발하는 태도를 보인다든지, 인물끼리 관계가 몇 회에 걸쳐 크게 변화가 있다든지. 실제로 시트콤에서는 다음 회 방영까지의 간격이 길지 않으니까 그 변화가 자연스러운데, 출판되는 단편 만화에서는 그런 변화가 결론으로 비칠까 고민이다. 방법을 찾으면 그려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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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빈소연, 〈마지막 장례식〉, 쪽프레스, 2019

Q   〈마지막 장례식〉(2020)의 발상이 기발했다. 설정과 소재 – 장례 후 아바타를 통해 고인과 함께 지낸다 – 도 흥미로웠지만, 이를 통해서 전개되는 중/노년의 여성들이 겪는 장벽과 기묘한 우정과 화해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감정과 인간성이 모호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만”든다고 소개하는데, 모호함에 대한 민감도가 여성들의 이야기를 풍부하게 하는 것 같다. 전형적인 노선에서 벗어난 인물들에 주목해보게 되기도 하고.

L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모호함은 인간은 모두 어느 한 구석이 되게 이상하다는 데서 온다. 그걸 제한된 프레임 안에 보여주기 때문에 모호함이 극대화된 인물이 만들어진다. 나에게 만화는 내가 정한 설정과 소재를 바탕으로 한 문제 상황을 해결해가는 거다. 그걸 수월하게 하기 위해 내가 만든 인물들은 현실에 있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허구적이다. 내가 그들을 자기반성이 가능하고, 서로의 입장차에 열린 태도로 반응하도록 설정해 놓았으니까. 현실이 매번 그렇진 않으니까 어떻게 보면 일종의 환상문학이기도 하다. 또 내가 만화에서 가장 즐기는 문제 해결 방식은 다소 폭력적이면서도 귀여운 결정이다. 누군가의 유골을 훔쳐서 아스팔트 길에 묻어버리거나 남의 젖꼭지를 꼬집어버리거나, 줬다가 도로 뺐거나 하는 행동들. 내 만화는 어떤 측면에선 정형화된 권선징악의 플롯인데, 그걸 해결하는 이가 완벽히 정의로운 인물이 아니기 때문에 극 전체의 모호함이 유지된다고 생각한다.

Q   음영, 색감, 특유의 몽환적인 분위기가 추구하시는 모호함을 직감적으로 잘 전달한다는 인상을 받는다. 전부 디지털로 작업하는지?

L    스케치나 낙서는 펜과 연필을 사용하고, 컬러링 대부분은 디지털로 작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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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2020년 6월 12일부터 7월 9일 전시공간(서울시 마포구 홍익로 5길 59, 1층)에서 진행한 개인전 《Final Touch》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부적, 제단, 의례 등 전시에 등장한 여러 소재가 특정 종교나 신앙의 상징이라기보다 종교심 혹은 ‘영적 파워’에 가까운 것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러한 소재에 관심을 갖게 된 배경과 작업을 통해 드러내고자 했던 것이 궁금하다.

L    아는 분 소개로 제주도에 있는 절에 새해 기도를 갔다. 처음 갔던 이후로 절이 주는 편안함이나 부처님을 뒷배로 둔 것 같은 기분을 좋아하게 되어 해외여행을 가면 근처 사원을 구경하는 게 낙이 되었다. 어렸을 때 불교유치원을 다녀서 절을 하는 방법은 아는데, 불자인가 하면 그건 아니다. 성당 가는 것도 좋아하는데, 천주교인도 아니다. 신의 존재는 믿지만, 특정 종교는 믿지 않는 거다. 작년에는 명상을 열심히 했다. 과거나 미래보다 현재가 제일인 사람이라 지금 순간의 행복과 즐거움을 중시한다. 가끔은 바쁘고 괴로운 상황에 여유를 찾기 위해 굳이 시간을 들여 명상을 하고, 절이나 성당을 가야 한다며 수선을 떨기도 한다. 하지만 그게 불가능할 때도 있고, 종교적 장소를 찾는 것만으로 어려움이 해소되는 게 아니라서 몸에 지닐 수 있는 영적인 액세서리를 사자 싶었다. 의미만으로 충족되는 게 아니라 몸에 걸치는 거니까 패셔너블한 걸 찾게 되었다.

신을 향한 이러한 뒤죽박죽인 태도의 정체가 대체 무엇일지 생각해봤다. 그런데 주위에 나와 비슷한 사람이 더 있었다. 또 크리스털 명상이나 음양 무늬 같은 것들이 힙한 문화로 변신 중인 듯한 피드와 아티클이 눈에 들어오고, 패션브랜드에서 명상과 동양 종교를 도입해 캠페인을 진행하는 것도 보였다. 영적인 것에 기대거나 ‘참된 나’를 찾는 개인이 먼저였는지, 트렌드에 반응한 소비자가 먼저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나와 같은 행동 양식을 띄는 사람이 몇 더 있는 것 같은데, 나와 그들은 왜 이런 것을 좋아하고 소비자가 되었을지 탐구하고 싶었다.

Q   예로부터 지금까지 존속하는 영적인 상징물들이 더 가볍고 투명한 형태(액세서리 등)로 재배치되는 것은 ‘밀레니얼’이 물질을 체감하는 방식이나 이 시대가 새로 마주하게 된 불안을 다루는 방법과도 연결이 되어있지 않을까.

L    그럴 수도. 밀레니얼 세대는 정보를 쉽고 가볍게 취하고 볼 수 있는데, 정작 자신이 뭘 봐야 하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른 채 부유하고 있다는 점이 불안을 야기하는 것 같다. 그걸 시각화하면, 투명한 구 안에 갇혀 밖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는 다 보이는데 자신이 어디 있는지는 모르는 이미지가 될 거다. 갇힌 곳이 전시된 액세서리라는 점이 삶을 전시하는 세대인 것과도 통하는 지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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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빈소연, 〈New Year Resol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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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빈소연, 〈How is Mayo Enlightened?〉

Q   〈How is Mayo Enlightened?〉와 〈New Year Resolution〉에는 여성의, 혹은 여성으로 추측되는 몸이 연속된 장면 속에 있는 것 같았는데, 이러한 장면은 어떻게 구상했나? 인물의 몸의 형체는 뿌옇게 표현되었지만 액세서리나 머리칼은 선명하게 대조를 이루는 등 구석구석 재미있게 보았다.

L    《Final Touch》의 작품들은 영적 파워의 충실한 소비자에 대한 이야기인 만큼 역설적인 상황을 그린다. 언급한 그림에 나타난 것처럼, ‘Mindful Mayo’라는 ‘마음챙김2’ 열풍이 탄생시킨 돌연변이 상품을 통해 마음의 안정을 찾으려 하지만 열리지 않는 뚜껑 때문에 낑낑대는 스트레스 상황이나, 새해 마음가짐을 새로이 하는 행동 중 하나로 생산적 활동과는 거리가 있는 신점 보기라는 점… 이 시리즈에 등장하는 인물은 나를 투영하여 그렸기 때문에 자연스레 여성으로 나타나는데, 중반쯤 작업했을 때는 이 역설을 흥미롭다기보다 비판하는 그림이라고 해석될까 봐 걱정이 됐다. 여성의 소비를 비꼬아보는 시각이 만들어낸 단어가 ‘김치녀’라면, 이 그림이 그 단어를 사용하는 이들에게 또 하나의 근거로 해석되거나 이와 같은 소비를 하는 이들에게 일침을 놓는 것처럼 보일까 봐. 한 작품 정도에는 남성을 그려야 할지 고민했지만, 그건 김치녀 프레임을 피하고 싶다는 제 안의 두려움이 만든 것이라는 판단이 들어 부러 수정하지 않았다. 언급한 것처럼 어떤 건 뿌옇고 어떤 건 선명하게 묘사한 건 전시를 보러 온 친구가 말해주어 인식하게 되었는데, 우선 내가 그런 미감에 자연스레 끌리는 게 가장 큰 요인이고,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것에 완벽히 무관심하고 반대로 좋아하는 것에는 열광적인 성격이 드러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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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빈소연, 〈Accelerator〉,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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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빈소연, 〈healing Biscuit〉, 170*170mm, 2020

Q   진행 중인 이야기 중 박제된 한 장면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래픽 노블 작업을 해서 궁금하게 된 것인데, 혹시 디지털 프린팅 작업들 각각이 어떤 서사나 설정을 품고 있나?

L    그렇다. 분량은 다르지만 각각 생각해놓은 이야기가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 같다. 혼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그 상상 중 가장 극적인 장면을 그리기 때문에. 그래서 아쉬운 부분도 있다. 예전에 읽은 책에서 다층적인 레이어의 이야기라도 매력적이거나 유용한 서사의 구성을 위해 많은 것이 생략된다는 말에 공감했다. 좋은 작품은 작가의 설명이 선택적인 것 같다. 그런데 아직 내 그림은 설명이 필수라는 생각이 들어서 노력하고 있다.

Q   출판물이나 포스터 작업에 이어 이번에는 미술 공간에서 프린트와 설치물을 보여주셨는데. 여러 매체에 대한 관심으로 읽히기도 한다. 앞으로 도전하고 싶은 매체나 접목하고 싶은 분야가 있는지?

L    그림과 접목시킬 매체는 찬찬히 공부하면서 탐구해보려 한다. 생소한 매체를 찾아 헤맬 것이 아니라 기술을 찾아보는 게 어떨까 싶은 생각도 하고. 현재 관심사는 공간에 더 쏠려 있다. 작업을 보거나 소장하는 방식은 웹과 출판물 정도로 제한적이다. 그 매체들은 어떻게 보면 결과물이다. 공간을 만드는 건 그 결과에 대한 경위서 같은 역할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전시 이전에는 페어에서 부스가 널찍하게 허락되면 공간을 이용해 작품이 나오게 된 상황이나 이유를 보여주려고 노력했지만, 역시 판매가 이뤄지는 곳이다 보니 내가 말을 많이 하고 있었다. 그래서 전시를 하게 되었을 때는 ‘어떤 그림’보다도 ‘어떤 공간을 만들까’를 먼저 생각하게 됐다.

Q   콘텐츠 소비자로서의 경험이 작업에 미치는 영향이 큰 것 같은데. 요즘에는 어떤 콘텐츠를 즐기는지 궁금하다.

L    Shannon Cartier Lucy 라는 화가의 팬이다. 계속 신작을 기다릴 정도로. 조현병을 앓는 아버지와 지내서 집 안의 물건들이 전혀 엉뚱한 곳에 있는 걸 보면서 자랐다고 한다. 그렇게 형성된 그녀의 인지 감각으로 그린 그림을 보면 위트 있으면서도 좀 서글픈 데가 있다. 약 십 년 만에 작품 생활을 재개하게 된 상황도 어떤 울림이 있었고.

작업할 때는 아이돌 음악을 듣는다. 요즘에는 유튜브 채널을 개설했고, 무료 음악을 찾는다고 유튜브 뮤직 라이브러리 페이지에 한참 들어가 있거나 가라지 밴드로 음악을 만들기도 하고(완벽한 초보). 또 유튜버들의 사과 영상에 관심이 생겼다. 그런 영상만의 공통된 연출이나 전달 방식을 보면서 만들어진 계기를 생각해보기도 하고. 유튜버마다 상황에 맞는 사과 방식이 있을 것 같은데, 왜 다들 저런 모습을 남기는 걸까 싶기도 하다. 부정한 행위를 비난할 필요도 있지만, 유튜버 사과 영상 특유의 미장센에 누군가가 초라하게 굴복하는 걸 봐야 끝을 내는 듯한, 현대인의 잔혹함을 충족시키는 요소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유튜브에서 동기부여 영상 같은 걸 좋아한다. ‘아는 것과 생각해내는 것의 차이’, ‘성공의 열쇠는 IQ가 아닌 기개(grit)다’ 뭐 이런 제목의 영상들. 지인에게 추천받아 세 번 본 넷플릭스 모큐멘터리 〈아메리칸 반달리즘〉도 다시 한번 더 볼 예정이고, 요즘엔 〈모래시계〉를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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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빈소연, 〈Love Education〉, 2021

Q   올해는 어떤 활동을 계획하고 있나?

L    최근에 전시 《비명횡사 非命橫死: 사라지는 것들 Deadly Blow》를 기획하고 참여했다. 일러스트와 만화를 기반으로 하는 작가 12인이 ‘사라짐’을 주제로 만화와 만화 작품의 모티프로 제작한 양초를 선보이는 전시였다. 〈Reconciliation with Sapiens〉라는 현대사회와 나의 화해를 그린 아트북 시리즈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전시에는 그 중 첫 번째 에피소드인 〈Love Education〉으로 참여했다. 또, 8월에 그룹전을 하게 되어 이것저것 흥미 가는 것들을 읽어보고 있다. 지난 개인전 《Final Touch》와 비슷한 맥락의, 정신적 가치를 상품화하고 또 그것을 소비하는 현상을 다룰 예정이다. 이번에는 ‘아침’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올해는 전시와 만화작업에 보다 집중하는 한 해가 될 것 같다. 사실 만화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어느 순간 관성의 이력이 없는데도 관성처럼 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만화를 그릴 때 들어가는 노동이 아깝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쉽게 그리려고만 하다보니 전달력이 떨어지고 어느새 ‘모호한’게 아니라 ‘이해 안 가는’ 만화를 그리고 있었다. 어떤 작업을 할 때 매번, 전부 ‘왜’와 ‘어떻게’를 생각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좋은 작품을 만들고 싶다면 한 번쯤 짚고 넘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속도나 양에 대한 욕심을 조금 버리고 지구력 있게, 독자들에게 제가 하고픈 이야기를 재미있게 잘 전달할 방법을 제대로 찾으려 한다. 시인과 함께 작업하는 장편만화가 올해 말쯤 출판될 예정이라 〈Shape of Shame〉 시리즈 3편은 내년에 작업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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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    짧은 시간에 많은 돈을 써서 쇼핑하고, 이를 보여주는 유튜브 콘텐츠 장르. ‘언박싱(unboxing)’ 장르와 달리 개별 제품에 집중하기보다 다량의 제품을 쓸어담듯 소비하는 것이 핵심이다. 

  2. 2    ‘mindfulness’에 대응하는 우리말로, 현대 명상 문화의 방법론의 일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