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알려두지
웃음소리와 비명은 비슷해
니키가와 미카, 〈헬터 스켈터Helter Skelter〉(2012)

1996년 아무로 나미에가 열아홉 살을 맞았을 때 그녀는 노래했다. 전생이 있다면 길 잃은 고양이일지도 모른다고(〈sweet 19 blues〉). 노래가 수록된 앨범 커버엔 검정 드레스를 입은 채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정면을 응시하는 아무로 나미에와 카메라가 보인다. 일본 여고생들은 나미에의 노래에 빠져들었고 그녀의 패션 스타일을 따라 고갸루kogyaru 족이 되었다. 미니스커트와 교복, 루즈 삭스를 착용한 소녀들이 시부야와 하라주쿠를 활보하며 90년대 일본 하위문화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하던 즈음, 망가 아티스트 오카자키 교코Kyoko Okazaki는 문제작 〈헬터 스켈터〉(1995-1996)를 연재했다. 미에 대한 욕망을 주체하지 못해 제 자신을 파괴하는 성형중독 연예인 리리코의 삶은 그녀의 아름다움을 선망하는 여고생들과 동떨어질 수 없었다. 16년 뒤 사와지리 에리카는 동명 원작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영화에서 리리코를 연기했다. 고갸루의 선두주자 리리코와 그녀를 선망하는 90년대 일본 여성을 스크린에 담은 감독은 니나가와 미카Mika Ninagawa. 90년대 일본의 ‘걸리 포토그래피’를 대표하는 사진작가였다.

한편 일본 사진계는 ‘히로믹스Hiromix’(본명은 도시카와 히로미Hiromi Toshikawa)의 등장에 주목했다. 발단은 캐논에서 주최한 ‘뉴 코스모스 오브 포토그래피New Cosmos Of Photography’. 매해 주목할 만한 신진작가를 선발하는 자리에서 히로믹스는 카메라로 자신의 일기를 써내려간 〈열입곱 살 소녀의 나날들Seventeen Girl Days〉(1995)을 출품했다.1 그녀는 대상을 이리저리 재지 않는 ‘포인트 앤 슛point and shoot’ 기법으로 여고생인 자신의 일상을 거침없이 담았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히로믹스의 재능을 눈여겨본 사람은 심사위원이었던 아라키 노부요시Nobuyoshi Araki였다. 노부요시는 선정의 말에서 감정의 운행에 자신을 맡기는 십대 여성을 극찬했고, 여러 저널을 통해 일본 사진계에 굉장한 인물이 나타났음을 알렸다. 사진비평가로 활동하다 히로믹스의 에이전트가 된 요시다 코지Koji Yoshida는 말한다. 히로믹스 이전엔 여성이 자신의 욕실과 화장실에 있는 사진을 볼 수 없었다고. 이젠 ‘걸후드 포토그래피girlhood photography’에서 쉬이 볼 수 있는 사진이기에 코지의 언급은 다소 어색하면서도, 그간 일본 사진계에서 여성의 재현과 여성 사진가의 운신이 얼마나 제한적이었는지 가늠케 한다.

1996년 3월 인터뷰 잡지 『스튜디오 보이스Studio Voice』는 히로믹스에게 50페이지를 할애하는 파격적인 기획물을 선보였다. 『스튜디오 보이스Studio Voice』는 ‘우리는 히로믹스를 사랑해’라는 기획 명을 통해 히로믹스를 하나의 현상으로 보았다. 히로믹스가 캐논 뉴 코스모스 오브 포토그래피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할 때 작가의 말을 함께 읽어보자. “열일곱 살 고교생의 일상은 위험으로 가득하다. 이 급격한 변화의 나날들. 이 스치듯 지나가는 나날들. 처량한 세상. 사랑은 왜 아픈가. 락은 내 삶이다. 내가 어른에 가까워진다는 게 점점 두렵다. 내 자신을 돌아보며 산다.” 히로믹스의 심정은 당시 10·20대 여성의 감정을 건드렸다. 또래는 그녀의 사진을 보며 위안을 얻었고, 즉석카메라로 시각 일기visual diary를 쓰기 시작했다. 1995년 일본 사진계에 파란을 일으키며 데뷔한 여성사진가는 8년 뒤 영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소피아 코폴라, 2003)에서 우울감에 시달린 채 일본을 배회하는 여성 샬럿(스칼렛 요한슨)과 파티를 즐기는 이로 깜짝 등장한다.

이제 1993년 도쿄 파르코 갤러리Parco Gallery로 떠나보자. 갤러리엔 무사시노 미술대학에 재학 중이던 나가시마 유리에Yurie Nagashima의 작품 〈가족Kasoku〉이 전시되었다. 그녀는 식구들과 카메라 앞에 있다. 언뜻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에 나오는 전형적인 가족사진의 구도가 한눈에 들어온다.2 작가 자신을 포함해 식구들이 누드로 촬영했다는 점으로 사진의 특성을 정리하기엔, 유리에의 어머니 옆에 위치한 텔레비전에 비친 어두운 상像이 꽤 흉흉해 보인다. 솔에 가린 고양이가 작가 옆에서 웅크린 채 카메라를 슬그머니 쳐다보는 모습도.

이후 유리에는 만화 ‘탱크 걸’의 캐릭터가 그려진 핑크 셔츠를 입고 셔츠 속 캐릭터를 모방한 자화상 〈탱크 걸 Tank Girl〉(1994)3로 일본 사진계의 변곡점을 시사하는 증언자가 되었다. 어린 시절 보부아르의 책을 열독하고 여중·여고를 나온 학창 시절을 사진에 스민 영향으로 밝혀온 그녀는 90년대 걸리 포토그래피로 호명되는 작가 중 일본 사회의 젠더 불평등을 가장 적극적으로 꼬집어온 페미니스트다. 2017년 예술잡지 〈프리Free〉와의 인터뷰에서 유리에는 한 아이의 엄마로 살아간다고 해서 여성이자 사진작가로서 마주하는 문제의식을 저버리진 않았음을, 외려 젠더 문제에 관한 고민이 커졌음을 예리하게 토해내기도 했다.4

나가시마 유리에가 중요한 아유는 자신을 비롯한 여성사진가들의 작업을 일본 사진계가 걸리 포토그래피로 범주화했을 때, 가장 비판적인 목소리를 낸 인물이기 때문이다. 유리에는 사진계 종사자들을 비롯해 자신의 사진에 열광했던 사람들이 여성의 ‘발칙한’ 자화상에만 천착했음을 지적했다. 또 실상 자신을 비롯해 여성사진가들이 사진을 통해 무슨 고민을 공유하고 싶어 했는지 물어본 사람은 당시 아무도 없었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오직 남성과 다른 ‘여성’ 사진가라는 외피에만 혈안이 된 흐름이 유리에에겐 90년대 일본의 걸리 포토그래피였다. 그녀는 일본 사진계·예술계·잡지계가 여성사진가의 활약을 연일 조명하면서도, 일본 사회가 여성과 여성성을 어떻게 자의적으로 배치시키는지 제대로 묻지 않음에 환멸을 느껴 돌연 외국 유학길에 올랐다.

이 글은 90년대 일본의 걸리 포토그래피에 대한 동화가 아니기에 나는 나가시마 유리에의 생각을 기점으로 몇 가지 질문과 답변을 펼쳐보고자 한다.

우선 90년대 당시 걸리 포토그래피로 호명된 작가들은 서로 유대·연대하는 젠더적 영역을 마련했을까. 꼭 그렇게만 볼 순 없는 기록들이 발견된다. 때는 2000년, 일본에서 사진가로 살아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받고 싶어 한다는 기무라 이헤이 어워드Kimura Ihei Award. 주최 측은 세 작가를 공동수상자로 발표했다. 기무라 이헤이 어워드 역사상 최초의 일이자 유일한 사례로 남은 주인공은 히로믹스, 나가시마 유리에, 니나가와 미카. 지난날 걸리 포토그래피를 대표하는 사진가들이었다. 한데 2018년 니나가와 미카가 예술경매저널 〈필립스Philips〉와의 인터뷰에서 그때를 회고하며 밝힌 답변이 인상적이다. “저는 왜 나 혼자가 아니지?라고 생각했습니다. 매우 불만족스러웠어요. 하지만 [이때의] 수상 경험을 제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존재가 되는 발판으로 삼고 싶었죠.”5

미카의 인터뷰를 인용한 이유는 걸리 포토그래피를 대표·대변하는 작가들을 이간질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다. 대신 이런 고민을 던져봄직하다. 90년대 일본의 걸리 포토그래피는 사진가, 비평가, 잡지 기획자, 패션계 종사자, 전시 기획자 등 각자의 입장에 맞게 어떤 형태로 분화·절합되었을까. 일정한 추론이 불가피하지만 기록들을 정리한 결과 90년대 일본의 걸리 포토그래피는 연대·연합적 성격의 젠더 운동이기보단 작가 개인의 브랜딩이 강조되어온 방향이 짙다.

1996년 사진비평가 이이자와 고타로Kotaro Iizawa가 “onnanoko shashinka”(우리말로 여성사진가, 해외에선 주로 걸리 포토그래피로 번역·통용되었다)라는 신조어로 90년대 일본 사진계를 명명했을 때를 상기해본다. 우리는 비평가가 내세운 용어에 무조건 도취되어선 안 될 것이다. 근래 몇 년간 걸리 포토그래피라는 이름으로 자주 호출되었던 90년대 여성사진가들은 그 당시 열기의 ‘수혜자’였음을 부인하지 않는 회고적 발언을 해왔다. 여기엔 나가시마 유리에의 논평처럼 사진가 자신과 작품이 새로운 명명 아래 어떻게 일방적으로 소비되어왔는지 의식해온 흔적도 담겨 있다.

질문을 이어가보자. 90년대 일본의 걸리 포토그래피는 일본 사진계 내에서 남성 사진가 중심의 한계를 다 같이 극복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움직임이었을까, 혹은 그저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으려는 관계자들의 염원이 고안해낸 담론적 기획물이었을까. 걸리 포토그래피가 90년대 대중문화에 퍼지면서 일본 여성의 예술·사진 관련 대학 입학률이 높아졌다는 결과 등 여성 예술생산자에 대한 긍정성이 거론되기도 했지만 좀 더 숙고가 필요한 대목이다. 또다른 질문. 90년대 일본의 걸리 포토그래피는 호평만 받았는가. 사진과 더불어 한 나라에 깃든 감정 문화를 살피면 도움이 될 듯하다. 우선 나는 사회학 연구자로서 한 시기에 대한 사회사를 써내려갈 때, 굵직한 의의가 있는 일들을 부착시키고 싶은 유혹이 들 때가 많다. 일례로 90년대 걸리 포토그래피를 논하는 과정에서 사진가들이 작품으로 내세운 ‘개인성’에서 감지되는 고독, 소통의 부재, 우울감, 내면의 부재 등을 경제적 하락에 접어든 90년대 일본 사회의 불안에 부착시키려는 서술의 유혹 말이다. 나는 그러한 헐거운 서술을 경계한다. 다만 90년대 일본 사회를 설명할 때 여러 논자들이 언급한 ‘귀염성cuteness’이 당시 일본 사회에서 어떠한 의미를 띠었는가는 걸리 포토그래피의 한계를 짚을 때 챙겨볼 재료다.

90년대 일본 사진계의 흐름 중 일부를 걸리 포토그래피로 부르는 시도가 정착되면서 비평가들은 일본 사진의 장밋빛 미래만을 내다보는 진단만을 펼치진 않았다. 평자들은 새로이 출현한 여성사진가들이 여성의 매력을 귀여움으로 몰아가는 일본 사회의 분위기에 저항하며 귀여움을 변주했다는 점을 상찬했지만, ‘귀여움’의 스테레오타입을 활용하면서 생기는 나르시시즘의 과다가 여성사진가의 작업을 옭아매지 않았는지 의구심을 꺼냈다(이는 사진가 당사자들에게도 언급된 바 있다). 이와 더불어 조심스러운 가늠이지만 아라키 노부요시가 사진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해온 ‘사적인 광경의 생산’과 관련해 90년대 걸리 포토그래피 여성사진가들이 노부요시가 고수하는 아름다움의 전형적인 자장에서 완전히 벗어났는가에 대해서도 함께 풀어볼 논제로 남겨두려 한다.6

그다음 90년대 일본의 걸리 포토그래피는 아름다움과 관련해 ‘일본성’을 의식하고 있었는지도 살펴볼 지점이다. 일단 니나가와 미카를 대변하는 다채로운 벚꽃 사진과 형형색색의 색감을 일본식 미로 해석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는 작업을 통해 일본성을 적극 어필하려는 작가 본인의 의지보단, 일본을 이국적인 문화 이미지로 소비하는 타국 예술계의 시각적 관심사와 결부지어 이야기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걸리 포토그래피는 어느 작가의 활동 영역까지 포괄하는가에 대한 물음도 추가해둔다. 소위 ‘걸후드’로 대변되는 히로믹스(1976-), 나가시마 유리에(1973-), 니나가와 미카(1972-)의 작업 외에도 자화상의 변형과 유형학적 사진의 응용을 통해 젠더 정체성을 지속적으로 탐문해온 사와다 토모코Tomoko Sawada(1977-), 그로테스크한 풍경 아래 환상성과 픽션의 가능성을 환기했던 시가 리에코Lieko Shiga(1980-), 포스트 포토그래피를 거쳐 가족사진에서 기억과 시간성, 사실과 허구의 혼재를 탐구했던 오츠카 치노Chino Otsuka(1972-), 이제는 일본을 대표하는 작가가 된 가와우치 린코Rinko Kawauchi(1977-)의 작업 또한 90년대 걸리 포토그래피의 영향권 아래 설명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90년대 걸리 포토그래피의 영향권을 확장하는 논의에서 간과해선 안 될 인물은 이시우치 미야코(1947-)다. 이시우치 미야코Miyako Ishiuchi는 1968년 일본 사진계를 발칵 뒤집어놓았던 일명 PROVOKE 파와 잠시 함께 활동했던 사진작가다. 『PROVOKE』는 세 권만이 출간된 단명한 잡지지만, 이 잡지의 멤버였던 모리야마 다이도Daidō Moriyama(1938-), 다카나시 유타카Yutaka Takanashi(1935-), 도마쓰 쇼메이(1930-), 그리고 아라키 노부요시(1940-)는 기존의 포토저널리즘에 대항하는 사진과 문학이 교합된 다큐멘터리적 사진으로 일약 스타가 되었다. 일명 ‘are-bure-boke(거친-흐릿한-초점이 나간)’로 불리는 PROVOKE 파의 사진 스타일은 그들의 일원이 된 이시우치 미야코의 작품에도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미야코는 활동 과정에서 PROVOKE 파를 추종하는 여성 팬과 동료들을 향한 멤버들의 성희롱과 성차별을 묵과할 수 없었다. 사진계의 변혁을 이끌다 점점 그들이 모멸했던 주류가 되어버린 PROVOKE 파에서 벗어나 미야코는 독자적인 길을 모색해나갔다. 현재 미야코는 일본 사진사에서 독립적인 여성사진가의 활로를 뚫은 중요한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미야코가 걸어온 삶을 볼 때, 나는 걸리 포토그래피를 일본 사진계의 90년대성을 정의하는 한정된 시선이 아닌, 일본 사진계 역사에서 여성 작가는 어떠한 난관에 봉착해왔으며 한계를 극복해온 활동상은 없었는지 발견하는 렌즈로 제안해보고 싶다.

비록 미디어의 주목도에 따른 작가·작품에 대한 제한적인 이미지 소비 가운데, 걸리 포토그래피가 일본 사진계의 지속된 젠더적 한계를 온전히 뚫었다고 볼 순 없을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여성사진가들이 나타났을 때 다들 한목소리로 내놓았던 호평은 사진을 생산하는 데 늘 거쳐야 하는 명망 있는 사진가와 그러한 사진가에게서 혹사당하는 기존 시스템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의 발현이었다. 이를 통해 90년대 일본의 여성사진가들은 웃음 띤 자화상 속에서도 이대로는 안 된다는 비명을 사진계를 향해 더 나아가 일본 사회를 향해 지르고 있었다. 우리는 이제 그녀들의 자화상에서 ‘카와이!(可愛い, 귀여워)’라는 뻔한 소감 대신 ‘베쯔니(別に, 별로)’라는 쿨한 정서를 감지할 첫 단계를 밟았다.7


  1. 1    작품 일부를 여기서 볼 수 있다. 

  2. 2    링크된 주소로 들어가면 사진을 볼 수 있다. 

  3. 3    링크된 주소로 들어가면 사진을 볼 수 있다. 

  4. 4    http://freemagazine.jp/yurie-nagashima/ 

  5. 5    https://www.phillips.com/article/31623055/mika-ninagawa-in-conversation 

  6. 6    입체적인 조망이 필요한 관계지만, 히로믹스는 자신에게 큰 영향을 끼친 멘토로 아라키 노부요시를 꼽기도 했다. 

  7. 7    필자는 남성이기 때문에 90년대 걸리 포토그래피를 논하는 과정상 제약을 시인한다. 고로 이 글을 통해 나눈 질문은 관객·독자들과의 협력을 위한 여백으로 남겨둔다.